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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묵상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주쫑 2019. 1. 3.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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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해설:

1. 1-12절: 율법의 본뜻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더 가까이 가거나 그분을 거부하고 배척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있던 사람들은 대개 그분을 의심하고 거부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걸어 고소할만한 꼬투리를 찾았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한쪽 손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그 사람들 데려다 놓았을지 모릅니다. 그 속셈을 알아 보신 예수님은 회피하지 않고 그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4절) 그분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율법 규정을 지키느냐의 여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하는 것 즉 생명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두라 하십니다. 율법의 본뜻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라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 규정에 묶인 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신 다음 예수님은 그 장애를 고쳐 주셨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제거할 궁리를 시작합니다(6절).

회당에서 나와 예수께서는 다시 호숫가로 나가셔서 가르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몰려 들었습니다. 갈릴리의 여러 동네에서 뿐 아니라 멀리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이방 땅에서도 사람들이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는대로 그들을 고쳐 주셨지만 너무도 많은 인파가 몰려 들자 배를 마련하여 배를 강단 삼아 해변에 모인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7-12절).


2. 13-19절: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들

예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원하시는 사람들”(13절)을 불러 “사도”(14절)로 세우십니다. 그 수가 “열둘”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생각나게 합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실패한 이스라엘을 대신할 새 언약의 백성을 세우시려고 열둘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열두 족장으로 세움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만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14절) 하셨습니다.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훈련 받을 문하생으로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을 내보내어서”(15절)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보냄받은 자” 즉 사도라고 불린 것입니다.

열둘의 면면을 보면 오합지졸이요 외인구단의 모습입니다. 그들 중 넷은 어부입니다. 당시 갈릴리에서 어부는 중하층에 속했습니다. 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는 레위라고도 불렸던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당시에 대표 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혈당원” 즉 유다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투사도 있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에 따라 붙는 “가룟”(19절)도 “자객”이라는 의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외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특기할 사항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 하나 하나를 보아도, 그들 전체를 묶어 놓고 보아도, 도무지 될 성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놀랍습니다. 그들이 예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었다니 말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듯이, 스스로 제자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은 자격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믿을 것이 없어 고개 숙인 사람들을 원하시고 부르십니다.


3. 20-35절: 똑바로 보라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분에 관한 중상모략도 함께 퍼져 나갔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가 미쳤다”(21절)는 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저 사람이 제 정신으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정신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니라고 결론 냈을 것입니다. 그 소문이 예수님의 가족에게까지 알려 졌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은 그분을 “붙잡으려고”(21절) 찾아 다닙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몇몇 율법학자들을 파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언행을 관찰하고는 그분이 당시 활동하던 영매들처럼 귀신에 사로잡혀 있으며 귀신의 우두머리를 무마시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서 지금 당신은 귀신을 무마시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쫓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귀신의 우두머리인 사탄과 ‘협잡’한 것이 아니라 사탄을 ‘결박’한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격퇴시키고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23-27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29절)고 경고하십니다. 성령께서 행하고 있는 일을 귀신 들린 것으로 왜곡시키는 것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수소문하여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기에 헤집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누군가에게 전갈을 보냅니다(31-32절). 그 소식을 전해 받자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절)고 물으시고는 주위에 둘러 앉은 사람들을 보시고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4-3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른 보기에는 육신적인 가정을 부정하신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머니께 대한 극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후에 가족을 따로 만나서 안심시켜 돌려 보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습관 대로 일상적인 사건을 소재로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하늘 아버지를 모신 영적 가정의 식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대한 한 가족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에게는 육신의 가족도 중요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설 줄 알아야 합니다.


묵상:

예수를 믿는다는 것 곧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살면서 배우고 훈련 받아 그분이 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성령을 선물로 받아 그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을 전부로 알고 살던 좁은 소견을 벗어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기를 배웁니다. 그러한 변화가 깊어지면 우리는 “예수의 동류”로 취급받습니다.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거룩한 변화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왜곡하고 헐뜯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거룩함의 밀도가 진해질수록 세속적인 사람들의 거부감은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믿음 안에서 나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있어서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거룩함의 밀도가 전해지고 있습니까?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오해, 모욕 혹은 비난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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