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장 묵상 "이 사람은 누구신가?"
마가복음 2장: 이 사람은 누구신가?
해설:
1. 1-12절: 죄 용서의 권한을 가지신 예수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어느 집에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그 집 안팎이 가득 찼습니다. 그 때 네 사람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 하나를 데리고 옵니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한 그들은 지붕을 뜯고 그 사람을 달아 내립니다. 당시 가옥의 구조와 재질이 그렇게 하기에 용이했습니다. 병든 친구를 살려 보겠다는 네 친구의 간절함이 그런 행동을 하게 했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분노하여 아우성을 쳤을 터인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절) 그 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5절)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병이 그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아 보셨던 것입니다.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질병의 증상이 아니라 뿌리를 치료해야 합니다.
그곳에 있던 율법학자들이 그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물으십니다(9절). 말할 것도 없이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 말대로 되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다면서(10절) 그 환자에게 일어나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환자가 일어나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 나갑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에게 죄 용서의 권한이 주어져 있음을 증명하십니다.
2. 13-17절: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
예수께서는 다시 바닷가로 나가셔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던 중에 그분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십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동족을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섬기는 사람들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멀리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중 하나를 부르십니다. 그는 마태라고도 불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가장 부적합한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레위에게는 예수님의 초청이 마치 하나님의 초청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즉시 따라 나섰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셔서 잔치를 베풉니다. 유유상종이라고,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15절)이 모여 들었습니다. 당시에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는 동류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겸상할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16절)라는 질문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고 대답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의 식탁은 사람들을 심판하고 구분하는 도구였습니다만, 예수님의 식탁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경험하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식탁에 초청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기준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환영하셨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율법학자들의 의가 세리와 죄인의 그것보다 월등히 높아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의 의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모두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의지할만한 의가 없기에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은 고생하여 쌓은 의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의인이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주장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사를 찾아가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3. 18-28절: 주인이신 분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매 주 두 번 이상 금식을 했습니다. 그들이 금식할 때는 여러 가지로 티가 나서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는 그런 표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표시를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18절). 예수님은, 지금은 혼인 잔치가 벌어지고 있고 자신은 신랑으로 와 있는 것(19절)이라고 답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십니다. 그러니 지금은 감사와 축하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레위의 집에서 나눈 잔치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20절)라고 덧붙이십니다.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비유를 드십니다(21-22절). 낡은 옷을 수선하기 위해 새 천을 사용하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 것처럼, 지금 당신을 통해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과거의 사고방식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얼마 후, 예수님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밀이 익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배가 고팠던 제자들은 밀이삭을 손으로 훑어서 허기를 채웠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예수님께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4절)라고 항의합니다. 손으로 밀이삭을 비벼 먹는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탈곡 행위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 대답하십니다(25-27절). 다윗은 왕이었기에 제사장밖에 먹을 수 없는 제단 빵을 먹어도 되었습니다. 왕은 제사장보다 높았기에 그래도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습니다. 이 대답 안에는 당신 자신이 다윗처럼 제사장보다 높은 존재라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이 율법에 구속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28절)라고 덧붙이십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대담한 도발입니다. 자신을 모세보다 더 높은 존재로 치켜 세운 것이니 말입니다.
묵상: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이 당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거듭 대면해야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 용서의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하십니다. 그 증거를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또한 당신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인도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이 베푼 혼인 잔치에 신랑으로 와 있으며 다윗 왕보다 더 크고 모세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말씀과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분이 누구인가?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제 정신으로 하는 말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입니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만 분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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