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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묵상 "무엇이 더러울까?/더러운것과 거룩한 것

by RangR 2019.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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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무엇이 더러울까?

해설:

1. 1-23절: 무엇이 더러운가?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조사단을 파견하여 정식으로 고발할 죄를 찾기 시작합니다(1절).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레위기의 정결법을 범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의 세부 규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장로들의 전통”(3절)입니다. 예컨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도록 그리고 부정해진 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도록 여러 가지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3-4절). 예수님은 그 전통을 과감하게 무시하셨습니다. 조사단은 그 점에 대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 하시면서(6-7절)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8절)을 대비시키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겠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전통을 만들었는데 그 전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만드는 도구로 오용되고 있는 사례를 몇 가지 드십니다(10-12절). 이것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답변인 셈입니다. 당신이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떠나간 후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러 놓고 정결 즉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믿음이 좋다는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을 접촉하지 않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결 즉 거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15-16절) 하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뒤집어 엎으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일종의 비유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과 배설물을 가리킵니다만, 실제로는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20-23절)을 의미합니다.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19절)는 말씀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율법 규정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도발을 하신 것입니다. 감히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부인한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근본적으로 거룩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창조하신 것을 더럽히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은 부정타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2. 24-37절: 아픔을 공감하시는 분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두로 지역으로 가십니다(24절). 그곳은 이방 땅입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 땅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온 존재가 부정해진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기에 거침 없이 이방 땅에 들어 가셨고 또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잘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는 한가한 시간을 얻을 줄 알았는데,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들 중 딸이 귀신 들려 고통 받는 여인이 있었습니다(25절). 그는 예수님께 딸을 고쳐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고 하시면서 거절하십니다. “개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은어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8절)라고 응답합니다. 자신은 어찌 대접 받아도 좋으니 딸만은 고쳐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님은 감동을 받으시고 그 딸을 고쳐 주십니다. 그 여인의 청에 대한 예수님의 냉담하고 경멸적인 언사는 그분의 본뜻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시돈과 데가볼리(요단강 동편에 있던 열 개의 이방 도시들)를 두루 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십니다(31절). 아쉽게도 그 지역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호수로 돌아 오셨을 때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32절)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호수 동쪽 그러니까 아직 이방 지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말씀 만으로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시던 분이 그를 따로 데리고 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33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34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에바다”(아람어로서 “열려라”는 뜻)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장애가 치유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 하셨는데, 그들은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신기하고 기뻤기 때문입니다(36-37절).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말씀 만으로 고치기에 그의 질환이 깊었기 때문일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말씀으로 못하실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일지 모릅니다. 사랑의 접촉은 때로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장애를 고치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경험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능력이 그를 고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그를 고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예수님의 사랑이 더욱 귀해 보입니다.


묵상: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거룩과 정결을 빌미로 영적 우월감을 누리며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차별하며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내면의 죄악은 그대로 둔 채로 여러 가지 종교 행위로 거룩하게 치장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종교 행위를 쌓아 가면서 스스로 거룩하다고 속이고 그 안에서 안주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의 종교 행위는 우리 내면의 죄악을 치유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 사랑을 더 깊이 경험 하자는 것이고, 그 사랑으로 더 온전히 변화 되자는 것이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맛보게 하자는 것 아닙니까?


가장 거룩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딸을 향한 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 하셨고 사랑에 목마른 한 사람을 따로 불러 뜨거운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고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은 거룩한 보석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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